[메디칼럼] 40년짜리 스카치 위스키 /황성환
부산항운병원

언짢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진료실로 들어온 70대 후반의 노인은 신경질부터 냈다. 병원을 오긴 했지만 뭔가 불안하고 심기가 불편한 듯 짧게 툭툭 던지는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듣기조차 거슬렸다. 두 개의 진료실을 번갈아 오가며 진료해도 정해진 시간에 환자를 소화해 내기 어려운 마당에 증상은 말하지 않고 엉기적엉기적 칭얼대기만 하는 노인 때문에 진찰시간은 지체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해야 진료도 하고 치료 계획을 세우지. 심통이 가득한 노인을 겨우 달래어 진찰대에 눕혔다. 엉덩이에 손도 못 대게 하는 노인을 힘들게 진찰하니 항문직장 주위에 크고 깊은 고름 주머니가 만져졌다. 얼마나 아팠으랴.

항문직장 주위에 생기는 고름 덩이를 항문주위농양이라 한다. 항문주위농양은 대개 항문샘으로 연결되는 수가 많다. 항문샘에 염증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위생상 청결하지 못한 까닭이다. 인체의 면역이 떨어지게 되면 평소에 같이 지내던 세균이 우리 몸을 공격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는 신체의 어느 부위라도 관찰된다. 과도한 음주나 과로로 인하여 컨디션이 나빠지고 심한 설사를 하게 되면 변에 섞인 세균이 항문샘에 염증을 일으켜 고름을 만들게 된다. 이는 나중에 항문샘에서 피부나 직장 점막 등으로 염증 길이 생기는 소위 ‘치루’로 진행되기도 한다.

염증은 항문샘의 주행 방향에 따라 피부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직장 점막을 따라 혹은 괄약근 사이를 거쳐 직장 벽을 구멍 내기도 하고 또는 괄약근을 뚫고 꼬리뼈나 엉덩이 깊은 곳으로 퍼지기도 한다. 항문염증은 어떤 경우는 낫지 않는 수도 있고 드물게 암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전격적이고 연속적으로 근육의 막을 침범하는 수도 있다. 어떤 때는 근육이 녹아내리고 회음부가 썩어버리는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따라서 적절하게 치료를 하면 간단하고 쉽게 해결되지만 자칫 치료 시기를 놓치면 불상사를 겪는 무서운 병이다.

필자는 환부의 상태가 위중해서 응급 배농을 해야 한다 했다. 근데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노인이 그냥 약이나 달랬다. 잘못하면 돌아가시는 수도 있다 했지만 막무가내로 집으로 간다길래 보호자를 부르라 하니 연락할 사람도 돌봐줄 사람도 없단다. 외항선을 타다가 일을 그만둔 지 20년쯤 되었고 부인은 세상을 뜨고 자식들은 멀리 떨어져 살아 연락도 안 되고 혼자 지낸 지 오래라고 했다. 그나마 예금해 둔 돈을 조금씩 깨어 먹고 사는데 병원비 낼 돈도 없고 수술이고 뭐고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병원비는 나중에 내세요. 제가 보호자가 되어 드리고 돈은 못 받아도 할 수 없고 형편 되는대로 내세요.” 눈이 휘둥그레진 노인이 진짜냐고 되물었다. “속아서 살았습니까? 의사가 뭣 하러 영감님께 거짓말하겠습니까?”

겨우 달래서 배농을 했으나 며칠 동안 염증을 묵힌 까닭에 엉덩이는 피고름으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노인이 수술 다음 날 바로 집엘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아프지도 않고 병원에 있는 게 바늘방석이라 하였다. 겨우 설득하여 하루를 더 입원시켰지만 다음 날 채 안정되지 않은 상태로 달아나듯 퇴원해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몇 주간 통원치료를 하였고 다행으로 노인은 무사히 회복되었다. 치료를 마무리 지을 즈음에 진료실을 찾은 노인은 신문지로 포장한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신문지를 풀어보니 속에는 찢어진 종이쪼가리에 정성껏 쓴 손편지도 들어 있었다. “원장 선생님, 양주는 오래될수록 좋은 것입니다. 참 오래되었습니다. 저녁 식사 전 소주 컵으로 1/2~ 1컵 정도 드시고 한 달간 드시면 인삼 녹용보다 좋습니다.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김00” 박스 속에는 18년산 스카치위스키 한 병이 들어 있었다. 호기심에 물어보았더니 젊었을 때 사서 집에 보관한 지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셈법이야 어떻든 간에 최소한 40년짜리 귀한 위스키인 셈이다. 이 고맙고도 소중한 위스키는 고이 간직해 뒀다가 혹시 사위라도 보게 되면 아들과 같이 셋이서 함께 맛을 보는 게 좋겠다.

부산항운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