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 메디칼럼] 외과의사 일기-‘포니에르괴저(壞疽)’ /황성환
부산항운병원

진료실에 들어선 51세 여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든 듯 온몸에 진땀을 흘리며 지친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방 전체는 혼탁한 악취로 가득 찼다. 몸이 썩어가는 냄새였다. 심상찮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응급수술을 하기로 했다. 문진을 해보니 고향을 떠나 돈 벌러 부산으로 왔고 두 딸은 외국에 산다고 했다. 혈혈단신으로 연락할 가족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보호자도 없었다.

(그림. 서상균)

전날 종합병원에 들렀으나 상태가 심각한 것을 인지한 외과의사가 우리 병원으로 가면 살 수 있다고 단단히 경고하며 급히 전원 조치했다.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이 정도 심각하게 진행되리라 예상치 못한 듯 병원으로 곧바로 오지 않았다. 왜 늦게 왔느냐 물어보니 직장에 업무 인계를 해 줘야 해서 바로 올 수 없었다 했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 느꼈으나 본인이 빠져 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몸담은 직장에 피해 입힐까 걱정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병은 ‘포니에르괴저(壞疽)’였다. 드물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다. 원인을 알기 어렵고, 면역이 떨어진 환자에서 회음을 중심으로 전격적으로 괴사가 시작된다. 빠른 속도로 비뇨생식기, 골반, 서혜부, 하복부와 하부 장관까지 근막을 통해 조직이 썩어가는 무서운 병이다. 파리의 의사 장 포니에르가 이런 환자를 보고한 후 회음 및 골반에 발생하는 심한 괴사성 근막염을 포니에르괴저라 부른다. 혼합감염으로 생기며 상상을 뛰어넘어 빠르게 나빠진다. 그녀는 패혈증에 빠졌고 회음에서 허벅지로, 사타구니, 우측 골반, 복부, 치골은 물론 옆구리까지 온몸이 썩고 있었다. 외과의사 30년 평생 역대급 중환자였다.

환자를 마주친 순간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중소병원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를 보호자 동의 없이 수술하는 것은 두렵고 부담스럽다. 가족이 없으면 최악의 경우 전원도 어렵고, 상태가 나빠지거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던 의사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최선을 다했더라도 치료 도중 만에 하나라도 과실이 발견되면 징벌적 보상까지 덤터기 쓰는 수도 있다. 외과 진료비 수가는 너무도 열악하여 이런 환자는 보면 볼수록 병원이 손해다. 그렇다면 이런 처지의 환자는 과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인가?

환자는 “3차 병원은 가지 않겠다, 선생님이 내 목숨을 구해줄 의사라 생각한다”고 했다. 말문이 꽉 막히고 머리가 아프다. 눈 딱 감고 119 요청하면 그만이었다. 환자를 떠맡을 작정을 한 것은 그녀의 고운 마음씨에 내 마음이 흔들린 탓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자신의 생명보다 직장이 먼저라며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이는 요즘 보기 드물다. 우리 같은 급성기 병원에는 하루 출근하고 일이 힘들다고 다음 날 소식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젊은이들이 허다하다.

외과계에 빈발하는 극심한 분쟁 때문에 위중한 환자를 치료해야 할 때 의사는 항상 머뭇거리게 된다. 성취와 좌절, 열정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이 대한민국 외과의 진료 현장이다. 저수가와 잦은 분쟁으로 낙담한 외과의사들이 요양병원이나 분쟁이 적은 곳을 찾아 떠나고 있다. 종합병원에 외과 과장 구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분쟁이 덜한 혈관 갑상선 유방 항문외과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십수 년 동안 각종 분쟁을 비롯하여 민사, 형사소송이 끊일 날이 없었다. 자칫하면 평생 외길을 걸어온 외과의사 생활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된다.

다수의 후배 외과의사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책임 있는 선배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때로 혼돈과 갈등, 고민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 어떤 때이든 후배들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누군가는 지켜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뿌리 깊고 오래된 나무는 바람에 너무 많이 흔들려봐서 덜 흔들린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의 시구처럼 나의 맡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환자 상태는 열흘 정도 사투를 벌이다 진정되었다. 어쩌다 떠맡긴 했으나 그녀는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구해 보겠다.


(부산제2항운병원장. 황성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10302.22021000279